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음악가인 윌리엄 해리슨 위더스 주니어는 15년에 걸친 그의 커리어 기간동안 수 많은 명곡들을 남겼고 Just the two of us 등을 비롯해 3개의 그래미 상을 수상했고 이 외에도 6개 부문에서 추가로 지명되고 하였고 그의 이러한 삶은 2009년 개봉된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따른 영화 스틸 빌의 주제이기도 했고 2015년 락앤롤 명예의 전망 및 그의 노래 중 2곡이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고 합니다.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슬랩 포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6남매 중 막내인 그는 사실 어릴 적에 말을 더듬는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고 이는 그를 사회에 적응시키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고 밝혔고 또한 그가 3살 때 그의 부모님은 이혼을 하여 어머니의 손에 자랐다고 하고 아버지는 13세에 돌아가셨다고 하고 17세에 군에 입대한 뒤로 9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봉사를 하면서 음악에 관심이 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해군에서 열심히 복무를 한 그는 1965년에 전역을 하여 본격적으로 1967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음악을 시작했고 비록 데뷔앨범은 사람들로부터 이목을 끌진 못했지만 나중에 재작업되기도 했고 어려운 환경에서 굴하지 않고 여러 기업에서 조립공으로 근무하면서 스스로의 자금으로 데모곡을 녹음하고 밤에는 소극장에서 공연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데모테이프들은 서식스레코즈의 소유주인 에번트에 의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오디션을 받기도 하였고 이를 인연으로 첫번째 소속사가 되었으며 앨범을 낼 수 있었지만 자금상의 문제로 약 6개월 간의 의도치않은 휴식기를 가지기도 했으나 어려웠던 과정과는 달리 앨범은 성공적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그는 순회공연을 시작할 수 있었고 골든디스크까지 수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투어를 마친 뒤에 두번째 앨범을 곧바로 작업하기 시작했고 싱글인 Lean on me는 주간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고 3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고 하고 뒤에 발매한 Use me 또한 골든디스크를 수상하면서 그는 3번째 밀리언셀러가 될 수 있었다고 하고 이를 바탕으로 카네기 홀에서 공연도 했지만 후에 소속사와의 분쟁때문에 한동안 녹음을 진행할 수 없었다고도 합니다.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그는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작업을 새로 시작했고 콘서트 투어를 다녔으며 그의 공연영상은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위더스는 낮고 부드러운 바리톤의 보컬과 다채로운 소울음악의 편곡으로 유명세를 떨쳤고 그 당시 다른 가수들로부터 가장 많이 커버된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고 그 중 Lean on me라는 노래는 다양한 버젼을 통해 빌보드 핫 100에 진입하였는데, 이는 순수 작곡이 아닌 편곡곡의 위치로서 차트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9곡 중에 하나로 알려져있다고 합니다. 한 잡지사의 편집자는 그의 노래는 미국 가곡집에서 가장 사랑받는 노래라고 평가하기도 하였고, 같은 언론사에서 다른 편집자 또한 그의 음악에 대한 역량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고, 그 외에도 많은 매체와 기자들로부터 클래식한 능력에 소울풀함을 겸비한 탁월한 가수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음악은 일과 가족, 그리고 사랑과 상실이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금 이야기해주었고 이에 따라 빌보드 측에서도 위더스가 R&B음악에서 가장 존경받는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고, 실제로 그의 유산과도 같은 음악들은 여러 가수들의 커버나 편곡을 통해 수십 년 동안 번창할 수 있게 만들기도 했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결혼 생활은 1973년 시트콤 룸222에 출연하는 동안 데니스 니콜라스라는 여배우와 결혼했고 1년 만인 1974년에 이혼했다고 밝혀져 있으며 약 2년이 지난 후에 또 다른 여성인 마르시아 존슨과 결혼했다고 알려져있고 둘 사이에서 두 자녀를 낳아 후에 위더스 출판사의 직접적인 경영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2020년에 LA의 한 병원에서 심장합병증으로 향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그의 가족들은 그가 사망하고 4일 후에 죽음을 발표했고 포레스트 기념 공원에 안장되었다고 전했습니다.